화완옹주는 1738년 3월 9일에 조선의 제 21대 왕 영조와 영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원래 이름은 용완인데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도세자의 친동생이자 조선의 제 22대 왕인 정조의 고모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정후겸은 그녀의 양자이지요. 동생이지만 그의 정적이었기 때문에, 정조가 즉위를 한 후 옹주 자격을 박탈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서인으로 강등되게 되지요. 정씨의 처라는 뜻에서 이름대신 정처라고 불리기도 하였는데요. 이 지위는 고종 때 가서야 다시 회복이 되었습니다.
화완옹주는 영조가 특히나 총애하던 딸인데요. 오빠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유는 오빠의 비행과 실수를 그대로 아버지께 일러 바쳤기 때문인데요. 인원왕후의 상 때 그녀의 나인이엇던 빙애를 후궁으로 취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추궁이 일자 이 빙애를 동생의 처소에 숨겨 두게되는데요.
누군가의 고발로 인해 존재가 알려지게 됩니다. 아마 이 누군가는 동생이었을 겁니다.
이런 사도 의 동셍 역시 유배생활을 피하지는 못했는데요. 양자 정후겸이 그를 제거 하려 하였기 때문에 죄인으로 취급되어 몰락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것처럼 죄인은 사살당하고, 옹주는 호를 잃고서 서인으로 강등 되어 정처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여러 딸들 중에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유배지를 옮길 때에도 처벌하라는 대신들의 말을 듣지 않은 채 결국 죄를 없애고 용서하라는 명이 떨어져 복귀하게 되는데요.
석방이 되어 돌아와 궁에 살면서 순조대에서도 탄핵이 있었으나 순조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시집을 간 후에도 자주 그녀의 집에 들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치달의 형인 정원달에게도 많은 특혜를 하사했습니다. 치딜이 세상을 뜨자 곡반을 하였는데, 이 떄 반대하는 신하들은 모두 파직을 명했습니다.
사도 의 가족이었지만 실록에는 삼사에서 올린 글에서 정처가 죽어 더 이상 죄를 묻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는데요. 아마 죽을 당시까지에도 죄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무덤지가 그 곳 주변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 구절에서도 볼 수 있듯 이제 '죽었으니 죄를 묻지 않는다'라는 뜻이 죽기 전에는 죄인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오빠와 동생 모두 그리 행복했던 삶은 아니었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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